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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 애무하기 Tipping the Velvet

BBC TV가 3부작 드라마로 만든 Tipping the Velvet은 이 소설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해석을 보여준다. 사실 난 드라마를 보기 전엔 이 소설이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고 보면 벨벳 애무하기는 세상의 온갖 자극적인 것들을 세상에서 가장 자극적인 방식으로 엮은 소설이었던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어촌의 10대 소녀, 연예장, 쇼쇼쇼, 남장여자, 장미, 런던,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한 침대, 템즈강, 도둑 키스, 수줍은 섹스, 과감한 섹스, 중단된 섹스, 남창, SM, 딜도, 하녀, 우렁각시, 상류층 레즈비언들의 모임, 사회주의, 짧은 머리, 목덜미, 능직무명 바지, 연설, 이별, 호모포비아, 재회, 양다리, 나도 몰라 내 마음, 성장... 처음엔 지나치게 빠른 드라마의 호흡 때문에, 이래서야 감정을 느낄 수가 없잖아! 투덜댔지만 드라마의 야심은 애당초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온갖 자극적인 것들을 세상에서 가장 자극적인 방식으로 엮어 보여주기!

"알아본다"
오래 전 오프라 윈프리 쇼에 어떤 남자가 자신의 책을 홍보하러 나온 걸 봤다.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언제 처음 알았는지를 인터뷰한 책이었다. 저자는 세상의 흔한 추측과는 달리, 상당수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아주 어릴 때 깨닫는다고 이야기했다. 10대도 되기 전에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덧붙였는데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것은 하나다. 예닐곱살쯤 된 소녀가 보수파들의 시위행진을 구경하고 있었다. 시위자 중 한 명이 든 피켓에는 "내 아들의 동성애, 닥터 OO가 고쳤다" 라는 문구가 적혀있었고 그 밑에는 그 닥터 OO의 전화번호가 있었다. 순간 소녀는 저 전화번호를 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닥터 OO에게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게 그녀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다.

"알아본다"
어떤 종류의 동성애자들에게 "알아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사랑이 찾아오는, 아찔하면서도 나른한, 흥분과 수줍음과 기대와 망설임이 교차편집되는, 한마디로 달콤한, 그런 느낌이 아닌 것이다. "알아본다"는 것은 연예장의 그 많은 공연 프로그램들 중에서 하필이면 남장여자가 내 가슴에 들어와 앉는 것이다. "우리"라고 믿었던 관중들로부터 "나" 자신만을 억지로 뜯어내는 느낌,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따돌리는 느낌, 아마도 이 따돌림은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 거라는 예감.

"알아본다"
커밍 아웃이니 아웃팅이니 하는 단어들은 아직도 여전히 서투르다. 정의할수록 미끄러지고 멀어진다. 벽장에서 스스로 나오는 것. 벽장에서 강제로 꺼내지는 것. 하나도 맞는 것이 없다. 전부 틀렸다. 나는 "스스로" 나오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따귀를 맞는 듯한 충격으로 호명되고 운명처럼 소환된다. 나는 나 자신을 "알아본" 죄로 끌려나온다. 사실 "나온다"라는 말도 틀렸다. 굳이 "벽장"이란 비유를 써야 한다면 나는 오히려 벽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혹은 벽장을 짊어지는 것이 아닐까?

"알아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상상하게 된다. 무심코 튼 TV에서 드라마로 제작된 Tipping the Velvet을 (아마도 가족과 함께) 보게 된 영국 촌구석의 어느 소녀를. 어느 날 갑자기 따귀를 맞는 듯한 충격으로 소녀는 "알아볼" 것이다. 또 다른 순환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호명"과 "소환", "알아봄"이 빙글빙글 알을 낳으며 세계를 유랑한다. 하지만 이 소녀의 경우는 우리 모두가 충분히 부러워할만 하다. 아마도 드라마를 보는 동안 그녀는, 그때까지 철썩같이 "우리"라고 믿었던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뜯어내야만 했을테고, 덕분에 비밀스러운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자신만의 초라한 방으로 돌아가 당장에 검색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만나게 될 빛나는 단어들을 떠올려보라! 동명의 원작소설! sarah waters! 최소한 그녀는, 동성애 연기로 인기를 끈 배우들의 돌림노래인 "나는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song을 견딜 필요는 없는 것이다.

벨벳 애무하기의 주인공 낸시 애슬리는 똑똑하지도 영리하지도 않아서, "호명"당하고 "소환"되어 "알아보는" 바로 그 순간을 "사랑이 찾아오는 순간"이라고 철썩같이 믿는다. 혹은 착각한다. 그녀는 아찔하면서도 나른하게, 흥분과 수줍음과 기대와 망설임의 교차편집을 온몸으로 느끼며, 한마디로 달콤하게, "알아본다". 그리고 작가는 이렇게 멍청하고 둔한 착각쟁이 아가씨만이 런던으로 상징되는 "다양성"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이 소설은 커다란 축복이다.

"다양성! 애슬리 양, 다양성은 세월에 시들지도 관습이 되어 진부해지지도 않습니다." 이제 블리스 씨는 키티를 향해 섰다. "우리는 잉글랜드 전역에서 가장 위대한 다양성의 신전 앞에 서 있습니다." 블리스 씨가 말했다. "당신은 신전 '안'에 서게 될 겁니다. 그 무대를 밟게 될 겁니다. 그리고 런던의 심장을 뛰게 하는 건 바로 당신이 될 겁니다! 런던은 바로 당신을 향해 목청껏 '브라보!'라고 외치게 될 겁니다!" -벨벳 애무하기 82p

by | 2009/06/30 03:20 | 기타 등등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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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orola's me2DAY at 2009/08/21 06:57

제목 : O.Ro.La의 생각
제목부터 확~~ 끌린 책. 이책의 리뷰를 보니 역시나 심상치 않다. 벨양에게 필히 상납해야할꺼 같다....more

Commented by mildk at 2009/06/30 21:28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홍보된 책 제목을 알수있을까요? 논문을 써야하는데 동성애자들의 인터뷰가 절실히 필요해서요... 혹시 알고계시면 댓글로 달아주시면 알될까해서요...
부탁드리겠습니다.
Commented by at 2009/07/01 22:15
책 제목과 저자 이름은 기억이 안 나네요. 찾는데 도움이 될 만한 단서라면.. 윈프리 쇼에 저자와 함께 Carson Kressley 가 나왔다는 것 정도입니다. 아마도 그도 인터뷰이 중의 한 명이었다고 했던 것 같네요.
Commented by 이지 at 2009/07/02 14:16
다양성! 다양성은 세월에 시들지도 관습이 되어 진부해지지도 않습니다! ㅋㅋ

"알아봄"의 tradition이 넓고 깊은 곳에서 살았던 소녀를 떠올렸던 원 감독이구나.
한국은 tradition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얄팍한 세월을 지나왔지만...
원 감독이 앞으로... (이하 생략)
Commented by at 2009/07/03 16:47
역시 요약의 황제! 난 주변에 이 얘길 그렇게 해놓고도 "알아봄의 tradition이 넓고 깊은"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줄 몰랐네! 그나저나 너 어쩌니... 읽고 싶어서... ㅋㅋ
원감독이 앞으로... 이지가 앞으로... (힘내자!)
Commented by mildk at 2009/07/03 14:18
알아냈어요^^
책 제목은 <When i knew> 저자는 Robert Trachtenberg 이네요..

Carson Kressley 가 결정적인 단서였네요.. 오프리 쇼 홈페이지에서 검색했더니 바로나오더라고요..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at 2009/07/03 16:48
참 쉬운 제목이었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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